경계의 빛과 그늘을 건너며

김수형 『AI시대의 문학비평』

2025-11-12

AI시대의 문학비평

-경계의 빛과 그늘을 건너며

 

 

김수형 문학평론가

 

 

 

“평론가는 더 이상 신탁의 사제(priest of oracle)가 아니다.” 20세기 후반 문학사회학자 테리 이글턴의 말은 권위적 해설자의 종말을 예감하게 했다. 이제 그 예감은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현실이 되었다. AI가 데이터를 분석하는 수준을 넘어서 창작과 비평의 영역까지 넘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ChatGPT는 방대한 텍스트와 문학이론을 스스로 학습하고 빠르게 호출하면서 문학비평이 축적한 학문적 지식에 대한, 일종의 ‘대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최근에는 몇몇 시인들이 ChatGPT를 통해 해설을 의뢰하고 시집을 발간하였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말한 ‘위험사회’의 관점으로 보자면 평론가의 권위와 기반이 흔들리면서 지식노동의 생태계가 재편되는 국면에 놓여 있는 듯하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맞물려 근래에 평론가들이 시집을 발간한 것은 단순한 쟝르의 전환이 아니라 비평이 더 이상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는 신호탄은 아닐까? AI가 예술 창작의 주체가 되는 시대, 최근 시집을 발간한 평론가들의 작품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탐색해보자.

 

 

 

1. 포스트휴먼 시대, 자리바꿈을 통한 언어의 윤리

 

AI의 등장은 문학계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변화이며, 동시에 비평의 형식과 가능성을 다시 묻는 계기이기도 하다. 그간 시인들은 유명 평론가에게 원고료를 지불하고 해설을 받는 게 관례였다. 이제는 원한다면 누구나 저렴한 비용으로 자신의 시집 해설을 ChatGPT에게 의뢰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평론가가 시인으로 자리바꿈하는 현상은 비평의 미래에 대한 하나의 징후일 수 있다. 평론가 유종호가 『충북선』(2022년)을, 최동호가 『생이 빛나는 오늘』(2024년)을, 황정산이 『거푸집의 국적』(2024년)을 펴낸 것이 뜻깊게 읽히는 이유이다.

 

길가 공터에 거푸집이 포개져 있다/ 시멘트 얼룩을 지우지도 못하고/ 잠시 누워 쉬고 있다/ 거친 질감이 상그러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흑단과 마호가니도 아니고/ 삼나무나 편백이 아니라 해도/ 그들도 이름은 있었을 것이다/ 와꾸나 데모도라 불리기도 하지만/ 응우옌이나 무함마드라 불러도 상관은 없다// 어디서 왔는지 누구도 묻지 않는다/ 상표도 장식도 아닌 국적을/ 구태여 말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들도/ 타이가의 차가운 하늘을 찌르거나/ 우림의 정글에 뿌리내려 아름드리가 되길 꿈꾸었으리라// 오늘도 도시를 떠받치던 불상의 목재 하나가/ 비계 사이에서 떨어지고 있다/ 이제 국적과 이름이 밝혀질 것이다

-황정산, 「거푸집의 국적」 전문

 

시멘트 얼룩이 묻은 거푸집은 도시의 잔재이자 이주노동자의 상징이다. “응우옌이나 무함마드라 불러도 상관은 없다”는 구절은 세계화 시대의 이름 없는 타자들을 소환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시가 AI시대 문학비평이 맞닥뜨린 새로운 상황과도 절묘하게 포개진다는 점이다. 평론가 황정산이 시인으로 전환하며 발간한 첫 시집의 표제작이 바로 「거푸집의 국적」이라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평론가라는 비평적 거푸집을 벗고 시인의 언어로 스스로 몸을 세우려는 전환이기도 하고 동시에 도시와 노동, 타자의 문제를 비판적 시각에서 시적으로 형상화한 결과물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특히 마지막 연은 이름 없는 거푸집이 무너지는 순간에야 국적과 이름이 드러나는 역설을 보여준다. 황정산은 시를 통해 언어의 거푸집을 깨고 문학이 사회적 타자를 어떻게 호명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2025년 문학나눔 도서로 선정되며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은 황정산은 AI가 재현하지 못할 인간적 상상력-타자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의 꿈을 회복시키는 언어의 윤리-를 증언한다.

 

어린 시절 새벽마다 콩나물시루에서 물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웃집에 셋방살이하던 아주머니가 외아들 공부시키려 콩나물/ 키우던 물방울 소리가 얇은 벽 너머에서 기도처럼 들려왔다.// 새벽마다 어린 우리들 잠 깨울까 봐 조심스럽게 연탄불 가는/ 소리도 들렸다. 불을 꺼뜨리지 않고 단잠을 자게 지켜 주시던,/ 일어나기 싫어 모르는 척하고 듣고 있던 어머니의 소리였다.// 콩나물 장수 홀어머니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어머니 가시고 콩나물 물 내리는 새벽 소리가 지나가면/ 불덩어리에서 연탄재 떼어내던 그 정성스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새벽잠 자주 깨는 요즈음 그 나지막한 소리들이 옛 기억에서/ 살아나와, 산사의 새벽 범종 소리가 미약한 생명들을 보살피듯,/ 스산한 가슴속에 들어와 맴돌며 조용히 마음을 쓸어주고 간다.

-최동호, 「어머니 범종 소리」 전문

 

제34회 정지용 문학상을 받은 이 작품은 시적 언어의 근원이 살아 있는 감각과 기억의 층위에 있음을 일깨워준다. 이 시에서 ‘소리’는 ‘기억의 그릇’이며 ‘생의 윤리’로 작동한다. 어린 시절 새벽마다 들리던 콩나물시루의 물 내리는 소리, 연탄불 가는 소리는 생의 밑바닥에서 이어온 모성적 보살핌에 대한 환유다. 시적 화자는 그 소리가 “기도처럼 들려왔다”라고 회상하며, 반복적 노동에 스며 있는 사랑을 존재의 근원적 진동으로 끌어올린다. AI가 복제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소리의 기억’-언어 이전의 온기, 모성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결과 화자의 윤리적 파동일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새벽 범종 소리는, 과거 어머니의 노동에서 느꼈던 체온이 현재의 나를 위로하는 거대한 울림이다. 그것은 단지 회상이 아니라 기억이 현재를 구원하는 윤리적 행위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충북선은 내 마음의/ 자연사 박물관/ 출발의 설레임은 언제나/ 종점의 허망으로 끝나고/ 달려와 사라지는 풍경에 끌리어/ 혼자만의 낮꿈을 즐겼지./ 카이저 수염의 백작인가/ 인단(仁丹) 광고판이 보이면/ 유치하게 부자가 되고 싶었지/ 타개진 가마니로 몸을 감싸고/ 화물차에 실려 가는 장정들/ 반역의 꿈은 사납고 무서워/ 무시로 먼 산이나 바라보았지/ 정하(井下), 오근장(梧根場), 도안(道安), 소이(蘇伊)/ 이국정서의 낯선 매혹에/ 팔랑개비 나그네로 살고 싶었으나/ 지갑이 얇아서 책장이나 뒤졌지/ 선불 맞은 맹수의 비명/ 증기 기관차의 기적 소리 아니 나고/ 들리느니 이제는/ 점잖은 디젤의 기적일 뿐이나/ 충북선은 여전히 3등 노선/ 내 고독의 자연사 박물관/ 잃어버린 시간의 잔설(殘雪)이 푸르구나

-유종호, 「충북선」 전문

 

‘충북선’은 한 세대의 정서를 담은 풍경이며 현대문명 속에서 인간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짚는 철길이다. “출발의 설레임은 언제나/ 종점의 허망으로 끝나고”의 대조는 시인 자신의 인생과 문학의 궤적을 압축한다. 증기기관차, 광고판, 가마니의 이미지는 산업화의 욕망과 좌절을 병치하며, “반역의 꿈은 사납고 무서워/ 무시로 먼 산이나 바라보았지”라는 구절은 억압적 체제 속에서의 내면적 저항을 상징한다. 시적 화자는“충북선은 내 마음의 자연사 박물관”이라 말하며 사라진 시대의 감성과 언어를 감정의 화석으로 보존한다. 느림과 회상의 윤리를 환기하는 이런 태도는 인공지능 확산과 속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되새겨야 할 가치와 통한다.

 

 

 

 

2. AI와 협업하는 아포페니아적 문학비평

 

  향후 AI 비평은 더 확장될 듯하다. 그렇다면 AI는 평론가를 온전히 대체할 것인가, 아니면 협업할 것인가. AI가 해설을 제공한 이인철의『AI 인류』(2025년)는 이 날카로운 질문에 대한 유의미한 답변을 보여준다. 소설가 박인이 AI와 함께 시평 담화를 하며 발표한 시집 『외사랑-인공지능과 시를』(2023년)도 새로운 문학비평의 등장이라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AI는 인간의 언어 감각을 방대한 텍스트로 학습하여 작품을 더 정확하고 빨리 읽겠지만, 인간의 삶과 텍스트를 연결하고 의미의 비약을 느낄 수 없다. 데이터를 압축하고 새로운 의미조합을 생성하는 능력에서 인간을 압도하지만 그것이 곧 비평적 사유의 완결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AI는 비평가로서의 윤리적인 책임이 없다. 제35회 정지용 문학상을 수상한 <충북선>과 황정산의 〈거푸집의 국적〉, 최동호의 〈어머니 범종소리〉가 맞닿는 지점은 모두 사물과 기억, 그리고 인간적 존엄의 회복이라는 문제의식에 있다. 타자의 복원(황정산), 돌봄의 윤리(최동호), 회상의 윤리(유종호)라는 비판적 시선을 통해 인간 언어의 지속 가능성을 증명한 것이다. 이 작품들은 AI비평이 ‘대체’의 서사가 아닌 ‘상생’의 서사로 나아가야 함을 암시한다. 비평의 본질은 시적 패턴과 의미 분석이 아니라 텍스트와 세계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고, 그로 인한 경험과 감정의 결을 일깨우며 독자의 해석 가능성을 여는 데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아포페니아가 무질서나 우연 속에서 의미 있는 패턴을 찾아내어 상호연관성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적 경향을 뜻하는 것처럼, AI는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유의미한 조합을 생성하며 잠재적 패턴을 제시한다. 그러나 무한한 아포페니아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것을 새로운 ‘의미’로 끌어올리고 검증을 하는 최종작업은 인간의 몫이다. 즉, AI는 언어의 표면에서 질서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평론가가 그 가능성을 맥락화함으로써 숨은 의미를 심오하게 확장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인철의 『AI 인류』 해설 초안은 ChatGPT가 먼저 작성하고, 평론가가 글의 개요와 제목을 부여하고 문체를 다듬었다. AI가 분석한 시집 해석의 패턴을 평론가가 맥락화하고 의미의 결을 보강하는 협업 모델이 형성된 것이다. 이는 대체 관계가 아니라 상보적 관계의 명시적 사례다. AI가 제공한 해설의 뼈대를 인간이 다듬어 출판물로 완성했다는 사실은 비평이 더 이상 ‘평론가의 단일한 권위’에 머물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3. 문학비평의 미래, 해체와 상생의 길목에서

 

  오늘날 문학비평은 AI와 인간이 상호작용하는 공동창작의 장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직관과 철학적 사유, 감정과 언어의 결을 기반으로 하는 문학비평의 전통적인 방식을 해체하는 동시에, 비평의 외연을 확장하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언어를 과학적으로 추적하고 언어의 의미망을 재구성하는 AI가 평론가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형식의 비평으로 진화할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평론가의 시 쓰기는 창작에 대한 단순한 욕망의 발현을 넘어, 문학적 노동의 구조와 가치 체계가 재편되는 시대적 징후로 해석된다. 이제 AI 비평의 시대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 생각할 시점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비평의 미래를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핵심은 역할의 재분배와 책임의 명료화다. 이를 위해서는 AI가 개입한 지점을 명확히 표기하고 사용한 언어모델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방식이 필요할 것이다. 비평의 윤리를 정립하는 실천을 통해 ‘재정의된 비평’은 개인의 소유물에서 벗어나 공적 실천의 장으로 확장될 수 있다. 향후 AI에 의한 생성문학은 문학적 지평을 확연히 넓히겠지만 그 의미를 증푹시키고 길을 완성하는 것은 역시 인간의 상상력과 문제인식이다. 문학비평의 미래는 결국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AI 비평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AI가 인간의 사유와 언어, 그리고 감정의 깊이를 재조명하는 성찰의 도구로 자리할 때 우리는 경계의 그늘을 지나 빛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이 AI 시대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새로운 문학의 윤리이자 인간 언어의 마지막 방주가 될 것이다.

 

 

 

 

김수형 문학평론가

시집: 『사랑한 것은 왜 모두 어제가 되어버릴까』,

『포화속 딸기는 발사된다』

비평집: 『존재의 푸른빛』 등

2019년 중앙신인문학상, 2023년 아르코문학나눔도서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