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멈추고 울림이 퍼지는
김제욱 - 2025년 겨울호
2025-10-30바람이 멈추고 울림이 퍼지는
- 천장사(天藏寺)에서
김제욱
정적이 귀를 친다. 바람이 멈추는 순간, 세상의 호흡이 얇게 흩어진다. 천장사(天藏寺)의 문이 열리고, 돌계단 사이로 오래된 숨결이 깨어난다. 그 결은 언어보다 먼저 다가와 소리보다 깊게, 빛보다 느리게 스민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무문(無門)이 열리고, 침묵이 먼저 와 길을 연다. 멈춤은 곧 길의 시작이다. 흙 위로 잔광이 내려앉고, 그 빛의 음성이 공기를 흔든다. 묻는 이와 대답하는 이의 경계는 희미하다. 모든 물음은 여전히 불씨로 내 결을 태운다.
없는 길을 묻는다. 스님이 한 걸음 내려오신다. 그 걸음이 바람의 결을 따라 흐른다. 그 호흡은 보이지 않는 틈에 닿아 머문다. 세상은 빠르게 기억을 잃고, 무상(無常)의 결이 공기 속에 퍼진다. 산과 구름 사이로 천장사의 공기가 옷자락 끝에 닿는다. 자연의 음표는 이미 온다. 말보다 먼저, 침묵의 잉크로 물든다.
이마에 번개의 자국이 다시 선다. 빛이 내 안을 가르고, 그 틈에서 한때의 음이 흘러나온다. 모든 날은 그 번개의 잔광 아래 서 있다.
지식의 가장자리에서 찾은 위안은 무엇일까? 속도의 언어에 쫓겨 휘발되는 사유들. 남아 있는 고요와 그 바깥의 잔여. 그 울림의 우둠지를 찾아 화답의 문을 두드린다. 소리의 문. 고요의 문. 열리는 것은 언제나 안쪽의 문이다. 약속도 인연도 없다. 바람이 나를 보내고, 그 흐름이 세월을 인도한다. 그 길은 천장사(天藏寺)에서 내 안으로 이어진다. 계단마다 그림자를 내려놓고 자성(自性)의 등불을 켠다. 그림자를 내려놓는다. 숨결은 식은 여명으로 흩어진다. 지나간 마음의 틈이 고요의 자리에서 피어난다.
고목정(古目精) 너머, 내륙에 닿은 바다의 가장자리에서 윤슬이 흔들린다. 그 결이 흔들린 자리마다 물빛이 스며든다. 그 진동이 마음의 벽을 스치며 조용한 울림을 남긴다. 비어 있는 자리가 생을 만들고, 그 파문으로 서 있는 자리는 다시 흩어진다. 보이지 않는 방향을 따라 남겨 둔 음성을 듣는다. 소리는 흐른다. 들려오는 듯, 사라지는 듯, 바람과 마음이 겹치는 자리에서 또 다른 생의 지도를 펼친다.
무기공(無記空)의 어느 생 위에서 소리가 빛으로, 빛이 마음으로 번진다. 마음이 고요로 스민다. 시간의 층위가 나를 감싼다. 종소리보다 느리고 물빛보다 선명한 하나의 무음이 세상을 덮는다. 그 안에서 나는 묻는다. 앎의 빛이 희미한 자리, 이제 우리는 무엇으로 자신을 비춰야 하는가. 멈출 수 없는 사유를 품은 채 길 없는 길을 걷는다. 고요는 어디에 머무는가.
바람이 멈추고, 울림이 울린다. 시간은 나를 모른 채 지나간다. 언어로 그 뒷모습을 더듬는다. 그 사이 고요가 피어난다. 돌기둥 아래 스며든 빛처럼, 말보다 멀리, 숨보다 느리게.
김제욱 시인
2009년 <현대시> 등단
시집 :『라디오 무덤』, 공저『질문하는 시민과 예술의y』
한서대학교 자유전공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