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백 살이고 여전히 죽음에 이르고 있다
조동범 - 2025년 겨울호
2025-10-30이미 백 살이고 여전히 죽음에 이르고 있다
조동범
나는 기이한 시대를 지나왔구나.* 오래전에 이 땅을 떠난 이들과 무너진 한여름의 태양을 생각한다. 전생으로 돌아가지 못한 자들이 해변의 벼랑에서 투신하는 꿈을 망설일 때. 그러나 망설임은 누구의 몫인지 알 수 없고, 무덤을 파헤치고 파헤쳐도 불우한 과거는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불확정성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이 파국을 향할 때 누군가는 도마뱀의 꼬리를 기원하지만, 행과 불행의 서사는 그 끝을 알 수 없다. 샤먼의 예언은 지워진 문양을 복기하며 흰수염고래의 아름다운 지느러미와 바다를 흐느끼려 한다. 그러나
나는 흰수염고래를 알지 못한다. 바닷속 깊은 어둠과 적막도 알지 못한다. 내가 백 년의 밤을 견딘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지난밤의 악몽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지상의 모든 계단은 끝도 없이 무너져 내리려 한다. 역사로 남지 못한 기담이 기이한 삶을 완성할 때
나는 다시 한번 이 땅을 떠난 이들과 불확정성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산짐승 한 마리가 숲의 어둠을 지나치며 바라보는 바람은 두려움인가 아닌가. 두려움은 거대한 불기둥처럼 거침없고 묘혈에 누우면 보이는 것은 언제나 벼랑 끝에 서 있는 고독뿐이다.
나는 오래도록 깨지 않는 꿈만 꾸었다. 잠들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고 고요한 잠은 뚜벅뚜벅 내일을 흐느끼고 있구나. 그러나 바람은 아직 먼 곳을 두런거릴 뿐이다. 흰수염고래가 지나온 수평선은 기원을 알 수 없는 어둠과 적막으로 가득하다. 그리하여
나는 이미 백 살이고 여전히 죽음에 이르고 있다.* 생이 다하는 순간을 상상하는 일은 슬프지만 지루하게 몰락하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이제 그만 멸망에 대한 서사를 떠올리고 싶어진다. 불확정성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나. 고단한 오후가 되면 나는 어느덧 기이한 시대를 저물고 있구나.
* 모니카 마론의 소설 「슬픈 짐승」의 문장을 변주함.
조동범 시인
2002년 『문학동네신인상』 작품 활동
시집:『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등
청마문학연구상, 딩아돌하작품상, 미네르바작품상, 김춘수시문학상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