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서 죽자
고진하 - 2025년 겨울호
2025-10-28우리, 집에서 죽자
고 진 하
우리 암에 걸려 죽게 되면
병원 가지 말고 집에서 죽자고 아내가 말했을 때
우리 몸에서 자라는 암세포가 들었으면 뭐라고 했을까
그래, 두고 보자고 하지 않았을까
평생 올씬갈씬거리는 욕망 짓누르며 살고
마음공부도 조금 깊어져
지상의 드문 미덕인
고요나 적막과 연애하는 방법도 나름 터득해 가는데
에효, 빌어먹을 놈!
지구라는 극장에 입장했으니
퇴장도 자연스런 일이지만
딱히 정해진 순서도 없이, 예행 연습도 없이
불현듯 퇴장을 명하는
에효, 빌어먹을 놈!
지난해 폐암에 걸려
갑자기 세상 뜬
동네 노인회장 무덤 앞을 지나다가
무덤에서 천천히 녹아내리는 봄눈을 바라보다가
아내가 말했다
우리 집에서 죽자고
제 멋대로 움직이는 자연의 불길함과 신성함을
둘만이 오롯이 맛보자고

고진하 시인
1987년 <세계의 문학> 등단.
시집 :『얼음수도원, 』,『명랑의 둘레,』,『야생의 위로』등
수상 : 영랑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박인환상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