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그 남자

문 숙 - 2025년 겨울호

2025-10-27

  내가 아는 그 남자

 

 

  문 숙

 

 

  그는 태생부터 겉과 속이 똑같아서

  꿈틀거릴 때마다 쉽게 데이고 쉽게 피멍이 들었다

  고개 한번 치켜든 적 없이 바르게 세상을 기어도

  늘 남의 발 밑에서 맴돌았다

  꽃향기가 화사한 어느 봄날

  눈이 뻘개진 다른 수컷에게 제 짝을 빼앗기자

  온몸에 그믐달을 새긴 채 토굴 속으로 파고들었다

  긴 시간 질척한 어둠 속에 자신을 가두고

  제 안에 부처 같은 중심을 세우고자

  용울음을 울었다

 

  파계승처럼 다시

  숨 쉴 곳을 찾아 느리게 세상 밖으로 나왔고

  새파란 여자를 만나 두어 해를 끈끈하게 잘 버텼다

  그만 보호색을 들켜버린 여자가 도마뱀처럼 꼬리를 감추자

  신용불량자인 여자를 찾아

  거칠고 뜨거운 길을 정신 없이 헤매고 다녔다

  중심 없는 몸은 진액이 빠져나갔고 물기 없이 말라갔다

  그는 끝내 그늘을 잃고 외로움에 데여

  자신을 길바닥에 지렁이처럼 내다버렸다

  어딘가에 자신을 붙여야만 살 수 있는

  무골의 영혼은

  비 오는 날보다 햇빛 짱짱한 날이 더 치명적이다

 

 

 

 

  

  문 숙 시인

  2000년《자유문학》등단

  시집:『단추』,『기울어짐에 대하여』등

  현대불교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