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물의 행성에서

박균수 - 2025년 겨울호

2025-10-27

  가물의 행성에서

 

 

  박균수

 

 

  버들가지 같은 낭창한 머리카락

  아직도 나붓대고 있니

  몇 년째 불어오는 비 내음

  불안하게 달려가는 짐승

  모양 구름들

  아직 이곳은 가물이야

  철골만 앙상한 꿈들 위로

  두껍고 새파란 유리창

  서로를 무표정하게 비추는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몽롱한 아지랑이만 추억인양

  가물가물 피어오르는

  새벽마다 양은 양동이 쩔그렁거리며

  폭격으로 무너진 극장 앞

  급수차로 모여드는 사람들

  해어진 가슴마다 덩그러니 놓인

  밑 빠진 독

  부어도 부어도 바닥도 적시지 못하는

  중력의 목마른 싱크홀

  여기는 모두 그런 사람들 뿐이야

  나도 그렇게 수십 년째

  찢어진 깃발로 터벅터벅 펄럭이고

  바람 꼬리지느러미에 달려 온 비린내

  눈감으면 환하게 밝아지는 우리 별

  한낮 어판장

  주린 배로 기웃대던 낡고 가난한 빛들

  생물 비늘에 눈 따갑게 반사되고

  여기서 살아남은

  마지막 물기의 기억

  마음속 산더미 같은 파도로 밀어닥쳐

  당신과 내가 손잡고 도망치던

  모든 골목을 휩쓸고

  아직도 남아있던 것들을 또 거두어가고

  나는 새삼 당신에게 애타고 애틋하지만

  애달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해

  여기선 모두 그렇게 살아

  당신은 거기서 보리밭을 파랗게 키워 줘

  가끔 잊지 않고

  그리움 같은 굴도 따고

  나는 이 행성이 있었다는

  이야기의 한 조각으로 남겠지 또한

  당신이 있는 한

  당신의 한 조각으로

 

 

 

 

박균수 

199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집 『적색거성』 『소멸의 산책』